최근 중고거래가 이전에 비해 굉장히 활발해졌음을 느낍니다. 중고 물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불안과 꺼림직함에서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중고거래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진 것도 한몫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플랫폼도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부터 시작해서 번개장터, 그리고 당근마켓까지 다양해졌습니다. 중고거래를 즐겨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 변화가 반갑습니다. 중고거래 이용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시세가 낮아질 수 있고, 물품이 다양해지거든요.
두 달 전, 번개장터에서 단돈 3만 원에 판매되는 부품용 랩탑 마더보드를 발견, 즉시 구매했습니다. 판매자는 해당 마더보드를 ThinkPad X1 Yoga Gen 4의 마더보드라고 설명했는데, 나중에 Lenovo Vantage로 확인해본 결과, ThinkPad X1 Carbon Gen 7의 마더보드였습니다.(Yoga와 Carbon은 동일 세대 기준, 동일한 마더보드를 사용합니다)
좌우지간 CPU(i7-8565U), RAM(DDR4 16GB), M/B를 모두 포함하여 송료 포함 3만 원은 이득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받고 여러가지를 테스트해본 결과, 전체적으로 정상 작동했지만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마더보드에 전원을 연결하면 첫 번째 부팅에는 HDMI로 화면이 출력되지만, 두 번째 부팅부터는 출력되지 않음
- 방열을 위한 히트파이프와 쿨링팬이 없음
- Wi-Fi 및 Bluetooth 연결을 위한 안테나가 없음
우선 2번 문제는 집구석 창고에 있는 10년 전 일체형 컴퓨터의 내부 쿨링팬과 히트싱크를 떼내어 DIY로 해결할 수 있었고, 3번 문제도 알리익스프레스에서 MHF4 형식의 안테나를 구매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번 문제는 좀처럼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1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전원 어댑터를 멀티탭의 스위치로 껐다 켜면서 사용했습니다.(전원을 연결한 후 첫 번째 부팅에는 화면이 정상적으로 출력되었습니다)



몇 주 후에, 레딧의 씽크패드 커뮤니티를 보고 1번 문제의 원인이 X1 Carbon Gen 7 모델의 BIOS/UEFI 및 썬더볼트 펌웨어에 결함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레노버의 다운로드 센터에 해당 모델을 조회해 보니, 화면 상단에 인텔의 썬더볼트 소프트웨어 및 펌웨어를 업데이트하라는 경고문이 빨갛게 표시되어 있었고, 그 증상으로 제가 겪고 있는 것과 동일한 증상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BIOS/UEFI와 썬더볼트 펌웨어를 업데이트하고 나서 문제의 현상은 말끔하게 사라졌고, 두 번째 부팅에도 문제없이 HDMI 포트로 화면 출력이 가능해져 더이상 멀티탭으로 전원을 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충동구매한 마더보드를 이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데스크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미 게임용 데스크탑을 한 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취방에 옮겨놓았기 때문에, 본가에 이동할 때는 항상 노트북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가에도 데스크탑을 하나 만들어 두면, 굳이 노트북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물론 노트북에 보관 중인 자료나, 설치된 프로그램 및 환경 때문에 계속 가지고 다닐 것 같긴 합니다만)
그리고 본래 랩탑용 마더보드이기 때문에, 게이밍 데스크탑 대비 몇 가지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
- 차지하는 부피가 매우 작음
- 소모하는 전력이 매우 적음
- 발열량이 매우 적음
- Wi-Fi와 Bluetooth가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음
단점
- SSD를 제외한 모든 부품이 마더보드에 실장되어 있어, 리볼링을 하지 않는 한 업그레이드가 불가능함
- 성능이 일반적인 사무용 노트북 수준임
- 확장성이 나쁨
단점 세 가지는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CPU와 RAM 모두 2024년 기준으로 일반적인 인터넷 서핑 및 영화 감상, 사무 작업 등을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성능이며, 빠른 반응 속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게임이라면 Moonlight 및 Sunshine을 이용하여 마치 네이티브처럼 플레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보단 성능을 희생해서 얻은 저전력이라는 특성이 굉장한 장점으로 다가옵니다. 게이밍 데스크탑은 단순히 켜놓기만 해도 랩탑 대비 배 이상의 전력을 소모하기 때문이죠.
썬더볼트 문제를 해결하는 시점에 마침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한 MHF4 안테나와 전원 스위치가 도착했고, 최종적으로 데스크탑으로 사용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랩탑 마더보드의 전원 스위치는 데스크 측면에 붙였을 때, 아주 누르기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한 전원 스위치와 연결하여 편리하게 전원을 켤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다만 이 전원 스위치가 본래 데스크탑 마더보드에 장착할 것을 상정하고 나온 물건이라, 스위치와 LED의 전선을 마더보드의 아주 작은 면적의 동박 패드에 납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납땜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선된 헤드폰의 전선 연결이나 마우스 스위치 교체 등의 비교적 쉬운 작업만 해봤기에 이번 작업은 시도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단돈 3만 원에 구매한 마더보드이지만 납땜을 하다가 고장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알리익스프레스에서 T12-952라는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인두기를 새로 샀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인두기는 세라믹 히터를 사용한 것이어서 가열과 열 회복이 많이 답답했는데, 새로 산 인두기는 일체형으로 된 길쭉한 인두팁을 사용하여 가열이 엄청나게 빠르고 열 회복도 시원시원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전원 스위치와 LED의 동박 패드에 전선을 납땜하는 데 성공했고, 전원 인가 및 LED의 정상 작동도 확인했습니다. 유튜브에서 작은 소자를 납땜하는 영상을 보면 거의 다 전자현미경을 사용하던데, 맨눈으로 하려고 하니 거북목과 시력 감퇴가 동시에 오는 느낌이었습니다.(이 작업 이후 전자현미경을 주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업이 끝났습니다. 이제 마더보드를 데스크 아랫부분의 측면에 고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가 놓여 있는 데스크의 밑부분을 찍은 사진입니다. 멀티탭과 휴대폰 충전기 및 케이블, 랜선 등의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많이 지저분해보이지만, 사실 동일한 환경의 데스크탑으로 세팅했을 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깔끔하고 공간 및 에너지 효율적인 구성입니다. 또,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 부분에 쿨링팬을 On/Off 할 수 있는 스위치도 있습니다.
쿨링팬의 경우 완전히 끄거나 풀 RPM으로 켤 수밖에 없는 상태라, 포텐셔미터의 전압 제어를 통한 RPM 제어를 시도해봤습니다. 그러나 제 지식 부족으로 인한 탓인지, 포텐셔미터에 10옴 고정 저항을 병렬로 연결하여 전원을 연결할 때마다 포텐셔미터의 가운데 핀이 죽는 문제가 발생하여 실패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PWM과 컨트롤러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위 사진은 모니터 우측을 찍은 사진입니다. 유전원 USB 허브는 기존에 사용하던 것을 활용했고, 전원 스위치는 위에서 납땜에 성공한 전선을 연결한 것으로, 청축 특유의 경쾌한 소리와 은은한 LED 불빛이 전원 스위치로 안성맞춤입니다.
24인치 모니터와 사운드바형 스피커, 모니터 바로 오른쪽의 아주 편리한 위치에 고정된 전원 스위치와 USB 허브, 그리고 사실상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본체! 이번에 구성한 데스크탑(본체가 데스크 아래 있으니 데스크바텀으로 불러야 할지도..)의 사용 경험은 마치 일체형 컴퓨터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납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건비와 소요 시간을 제외하고) 단돈 3만 원에 준수한 성능의 PC 환경을 직접 구성하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시간을 들여 진행한 작업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때의 성취감과 뿌듯함은 3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것 같습니다.